한국어
공지사항
4월 둘째 주 2017-04-09
4월 첫째 주 2017-04-09
3월 넷째 주 2017-04-09
3월 셋째 주 2017-04-09
3월 둘째 주 2017-04-09
사진마당
조회 수 2789 추천 수 0 댓글 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http://chachacha.jinbo.net/bbs/board.php?bo_table=webzine&wr_id=167)http://www.runtoruin.com/1198?TSSESSIONruntoruincom=4c51038d2cb2a0c946170458140c5c88(아래 해달이 님 글에 덧글로 달던 말씀에 이어 올립니다.)

저도 당시 예수의 성별이 무엇이냐 하는 것과(+당시 신의 아들이라 파악하고 칭하던 것과) 오늘날의 페미니즘이('오늘날의 페미니즘'이라는 말로 이 또한 하나로 규정될 수 없는 거지만;;) 갑자기 만나는 걸 기대하거나 원하는 건 아닙니다. 구약과 신약 등의 성서를 오늘날 모든 말을 말 그대로 해석하지 않듯 말이지요. 제 말씀은 그런 게 아니라, 평소 읊는 고백문이나 기도문, 성가 가사 등에서 '아버지' '(외)아들' 이런 말을 반복하는 것의 의미에 대한 고민과 불편함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뭐였든 이 문제는 별개라 생각하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 각자가 사는 삶과 가치관이 반영되는 해석이고 재창조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예수의 성별이라는 말씀을 듣고 생각해 보건대, 애초 이 문제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누구에게든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을 뿐이라 하는 것이 우리에겐 오히려 더 정직한 태도가 아닐까 합니다. 왜냐면 당시에는 당연히 '남성'이 아니면 공식적인/온전한 '인간'이 아니고(여성은 그 자체로 ‘인’이 아니라 ‘여’인이지요), 따라서 당연히 '아들'이 아니면 공식적인 '자식'으로 보지도 않기 때문에, 가령 오늘날의 '딸'이라는 대비를 상상하더라도 애초 의미가 없고, 그냥 '자식' 하면 당연히 '남성'이고 '아들'이고 '아버지'였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회에서는(사실 유감스럽게도 지금 이 사회라도 마찬가지일 것 같지만) ‘성별’이란 건 애초 의문의 여지가 없을 만큼 견고한 그 문화적 맥락 때문에, 하나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거라는 말이지요.
더구나 예수의 ‘생물학적’ 성별이 무엇이었는지, 이것이 정말로 이 문제제기의 중요하고 본질적인 접근이거나 해법이었다면, 한번이라도 그 ‘생물학적’ 성이 정말 밝혀졌는지에 대해 진지한 논의가 있기 전에는 ‘아들이었다면 아들이 맞겠지’라 생각하기도 어려웠겠지요. 가령 어떤 산파(나 요즘이라면 의사)가 예수가 태어났을 때 아기를 받아서 그 아기의 성별을 감식하는 과정이 있었을지, 그 과정도 없이 어떻게 ‘아들’이라고 파악했을지에 대한 의문이 중요하게 여겨졌고 그것을 전제로 예수의 성별을 언급하는 맥락이, 과연 있었을까 하는 겁니다. 신생아의 1차 성징 기관을 파악해 ‘딸이다’ ‘아들이다’ 또는 ‘지금은 알 수 없고 좀 더 기다려보거나 의학적 조치를 하겠느냐?’(신생아를 1차 성징 기관(성기, 즉 음경과 클리토리스)으로 이분할 수 없는 경우 각각의 cm를 기준으로 성별 명칭을 정하며, 결국 판별할 수 없는 2,000명 중 한 명은 간성으로 분류됩니다*) 등등... 이라고 했을 과정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만, 이것을 아무도 중요한 문제로 삼지 않지요(오히려 이런 이야기를 상상하거나 언급하는 일조차 불경스럽다거나 외설적이라는 취급을,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로 맞기가 훨씬 쉬울망정 말입니다).
만일 그렇게 해서 밝혀지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면,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생물학적 성별이 어땠더라 하는 것을 밝혀서 아무튼 고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검증하고 알고 보니 남성이 아니었더라 하는 경우가 생긴다 해도(그런 작업에 의문을 갖고 진지하게 파헤칠 가능성도 의미도 없을 것이고, 만일 가령 여성이었다면 그 존재가 메시야로 추앙받거나 그렇게까지 당시의 권력에 대한 혐오세력으로 낙인찍혀 그렇게 대대적으로 처형되었거나 할 리도 없지만[똑같이 끔찍하게 처형되었더라도 역사에서는 마녀사냥으로 조용히 사라졌을망정]), 그럼 그 다른 명칭으로 부르기만 하면, 그렇게 모든 기도문과 고백문과 찬송 가사를 개정하여 부르기만 하면, 이 물음의 취지가 온전히 이해되고 해결된 것이어야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예수의 성별’을 ‘아무도 묻지(도) 않’는 것이 ‘일반적/정상적/주류 (신학)’이다가, ‘신은 남성인가’ ‘왜 아들/아버지라 하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갑자기’ 방어 논리로만 낯설게도 처음 나타나는 것, 이 순간 자체가 저는 의문과 성찰이 놓여야 할 과제의 하나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더구나 그렇게 별 의문이나 성찰 없이 그대로 받아다가 오늘날 우리 입으로 기도문, 고백문, 가사 등을 통해 하루하루, 한 주 한 주, 끝없이 반복하고 재현하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는 분명 그 문제에 대한 ‘의문 없음’ 자체가 괜찮을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무엇이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 속에 매우 뿌리 깊게, 암묵적으로뿐 아니라 공공연하게도, 유효하게 남아 있음을 그대로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성삼위일체'론에 대한 여러 문제제기나 모순이나 이견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당연한 듯이 연결됨을 가정하는, 즉 '예수의 성별'만으로 한큐에 설명 가능한 것처럼 가정되나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신은 남성인가(+젠더를 부여해 명칭을 부르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물음 또한 여전히 '예수의 성별' 문제와 별개로 유효하다고 생각하고요. 누군가 권위 있는 사람을 '아버지'라 비유하는 것이 가장 편안하고 적절한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지요. 이런 맥락에서는 설사 갑자기 '어머니'로 대체해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또 어머니로서의 특정 이미지 - (현재 '마리아'에게 투사되고 있는) 자애로운 모성성, 여기에 아마도 덧붙을 '(모든 것을 낳는 창조주로서의) 어머니 대자연' 같은 - 에만 기대게 될 테니 당장의 대안도 아닐 것이고요. 이런 고민들이 있는 겁니다.

또한 이런 고민이 ‘여성신학’ ‘여성신학자’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의 영역/전유물이라고 쉽게 치부되면서, ‘지금 당장의 큰 줄기나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 그것은 그런 영역에서 알아서 논의하면 되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하는 식으로 ‘치워’지는 것에도 저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어떤 ‘신학적(누가 어떤 맥락에서 다루느냐에 따라 성/젠더/페미니즘 문제는 분명 제외/배제한 것이 전제되어 보이는)’ 문제는 과연 더 중립적이고 본질적이며 중요하고, 반면에 ‘아버지’ ‘아들’이라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바람직한가를 묻는 일에 관한 문제 같은 것은 그보다는 좀 더 편파적이고 주변적이며 별로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태도 말씀입니다. 가령 저 같은 사람이 ‘저는 신학을 잘 모르지만’ ‘목회자도 신학자도 아닌 평신도지만’ 이라고 말하면서 저 스스로도 제가 잘 모르는 영역에 관하여 말하기를 저도 모르게 매우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고 위축되기도 하여 방어하는 말이 길어지는 것에 비하여(글이나 덧글을 달 때 여러 번 그런 자기검열을 배제하려고 지웠는데도 아직도 제 글을 돌아보면 많이 남아 있더군요ㅠ), 신학 연구자나 목회자가 ‘저는 페미니즘을 잘 모르지만’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미안하지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자연스러움과 당당함에서 분명히 ‘위상이 다르다’고 할 만치 현격한 차이가 난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지요.

(*주: 저를 포함해 진지하게 생물학적 성별 개념과 한계에 관해 관심 있을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번 읽어보면 공부가 될 만한 다음 두 링크를 참고로 걸어둡니다. 추신으로 덧붙일까 하다가; 암튼 그리하여 이곳에 주까지 등장했군요 죄송;ㅠ 잉)
http://www.runtoruin.com/1198?TSSESSIONruntoruincom=4c51038d2cb2a0c946170458140c5c88
http://chachacha.jinbo.net/bbs/board.php?bo_table=webzine&wr_id=167


-------------------------------------
어떤 조직에서 ‘정체성’이 얼마큼이든 걸린/엮인 논의가 된다고 할 때, 그 ‘정체성’을 논의할 수 있는 주체가 누구이냐 하는 문제도 분명 (모든 ‘신학적’ 논쟁에 앞서서) 중요하게 전제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저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엔 실제로 많은 분들이 덧글이나 글을 더 달고 싶어도 이리저리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나 침묵하는 분위기에는 이런 상황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저 자신도, 다행히 운영위에서 ‘남녀노소 누구든 대등하게’ 토론하기를 주문하고 보장해주는 글을 보고 그나마 좀 더 용기가 나긴 했지만, 솔직히 쉽게 되지는 않습니다. 저 자신 (주말출근포함) 업무시간에 틈틈이 이런 고민을 하고 글을 달면서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 신학자나 목회자 들이 알아서 결정하고 내가 그에 맞지 않으면 내가 불편하면 언젠가 못 나가게 될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러면 되는 건가?’ 생각하다가도 뭔가 불편하고 그렇게만 결정되긴 억울하면서도 물리적 시간이나 고민의 깊이 자체가 다름을 알고 있기도 하고. 어쨌든 제가 왜 나도 모르게 이렇게 이 문제에 감정적으로도 힘들어서 저절로 글을 쓰게 될 만큼 영향 받고 나도 모르게 개입하고 있을까를 돌아보니, 이번의 ‘신학적’으로 마치 ‘옳고 그르고’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의 문제제기에 저 또한 저 나름의 입장에서 위기감을 느끼는 게 사실이라 그렇습니다. 신학자인지 목회자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지만 그런 선언과는 달리 실제 상황에서는 매우 중요한 것 같거든요. 어떤 평신도가 아무리 자기 생각이 확신에 찼다고 해도, ‘이것은 분명히 문제다, 당신은 문제 있다, 틀렸다, 똑바로 하라’는 식으로 타인에게 외칠 수 있겠습니까? ... 그렇게 되면 저 같은 사람은 점점 다시 자칫하면 ‘남의 교회’가 되어갈 수도 있다는 느낌... 최악의 경우 (물론 이건 기우로 그치길 바라는 낙관이 있기에 뭐라뭐라 얘기에 참여해서 하고 있는 것이지만) 만일 ‘국으로 정해주는 걸 받아 먹든지 아니면 말아라’ 하는 게 되는 순간, 저는 그 배제되는 느낌이 재미 없어서, 힘들어질 것 같다는 느낌까지 들었거든요. 어떤 것이 정답이라면, 누군가 그걸 ‘정답은 이런 거다’ 하고 ‘가르쳐주면’ 됩니다만, 그것에 참여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배제된 사람이 있다면(그게 양 무리 중 한 마리이든, 암양이든 뭐든 간에) 그 사람은 그 정답을 수용할 의무도 책임도 권한도 발언권도 없게 되는 것인데, 저는 지난 일욜에 그 글을 보고 난 평신도 몇의 대화에서 ‘우리는 애초 여기에 간여할 수 없어...’라는 말에 부인할 수 없는 기분이 들면서 그런 비슷한 무력감을 이미 느꼈더랬습니다... 스쳐갔든 뭐든 간에, 그런 상황이 어쨌든 분명 이미 있었다는 겁니다. 다들 애쓰고 계시는 만큼 분명히 마침내 그런 무력감은 기우로 그치고 지나가며, 갈등이 이후의 관계를 더 단단히 만들어줄 거라는 낙관으로, 최대한 솔직하게 적으려고 했습니다.

------------------
[2012.2.29 수정: 맨 아래 있던 괄호 안의 주를 위 글 내용에 이어 붙이고, 아래 좀 다른 내용의 글과 분리합니당. 제목엔 나눠놨지만 길어지며 다른 얘기로 넘어가느라 헷갈리게 쓴 거 같아서;ㅎ]

  • ?
    해달이 2012.02.29 14:44
    ㅋ네^^ 잘읽었습니다. 한데 저의 조건은 이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만약 남자로 태어나셨더라면 이었습니다. 가정법을 단거죠!!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요...한백식구들한테뿐만 아니라 다른 기독교인들한테 제가 맞아죽을 수도 있겠지만^^ 19세기 성서에 관한 물음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린 사람들 중에는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신화적 인물이라고 판단했다는 겁니다. 사실 바울 서신 중에서 유일하게 갈라디아서에서 예수께서 어떻게 이 땅에 나셨는지를 말합니다. 저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알듯이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면-사실 이 마리아라는 이름은 흔히 빠진 이름입니다-왜 바울은 그 흔하디 흔해 빠진 마리아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걸까요? 이상하게도 그냥 여자에게서라고 만 말합니다. 그것도 동정녀인지 아니면 이사야에서처럼 혼기가 찬 여자를 말하는 건지 물론 혼기가 찬 여자겠죠? 그리고 율법아래에서 나셨다는 말은 또 무엇을 말합니까? 뭔 말인지 당체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율법아래서 나셨는데 어느날 득도하셔서 복음서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먹보라고 불리신 건지? 헷갈리기만 합니다. 해서 가정법을 단겁니다. 사실 저는 어떠한 의미에선 신화론자들의 물음이 적절하고 또한 중요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보수주의자인 James Dunn조차도 슈트라우스를 가볍게 처리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학자들만 그렇죠! 물론 저는 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언제나 성서는 해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한데 이게 대단히 복잡하겠죠? 우리가 과연 무엇을 가정할 수 있고 어디까지가 한계인지를 말입니다. 물론 한계는 없을 겁니다. 결국엔 공동체가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가져가느냐가 최후의 물음이니까요? 한데 이번과 같은 한백의 논쟁에서 보듯이 저는 사실 한백이 겪고 있는 이 갈등이 성서를 어떠한 한계까지 가져갈 것인지를 놓고 벌이는 일종의 전투라고 생각합니다. 해석이 과연 어디까지 일까요? 해석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면 신화가 되고 해석을 다른 방향으로 밀어붙이면 역사가 되는 이 미묘한 신학적 게임에서 우리가 무엇을 발굴할 수 있을까요? 물론 한백은 신화로 읽지 않습니다. 다행이거겠죠?*^^*ㅎ 하지만 역사병에 우리가 걸려 있으면 페미니즘이나 다른 해석의 장치로도 읽을수 없다는 겁니다. 한데 문제는 역사병에 걸려 사람들이 너무 많은 이론을 동원해 성서를 해석하다는 겁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신화적으로 읽으면) 신은 여성일 수도 있고 남성으로 읽을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합니다. 한데 이걸 역사로 가져가면 무수한 많은 논쟁이 양산된다는 겁니다. 지적하신 의견에 충분히 동의합니다*^^* 저는 단지 역사로 읽을 때 생기는 골치아픈 문제를 지적한 겁니다.~~ㅎ
  • ?
    청올 2012.02.29 15:23
    네네, 잘 읽었고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선생님만큼 신학적인 측면의 접근을 잘 알고 동의하는 건 아니고 물론 이 깜냥 안에서라서 너무 그 이해의 폭은 큰 차이가 나겠지만요 뭐 말할것도없이ㅋ). 다만 저는 제 글에서 만약 예수가 (실존 인물인 걸 전제/가정하고 얘기했을 때 그 한계 안에서, 또는 실존이냐 자체가 역사적 해석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 상징적 의미에서, 말하자면 현실에 존재하는지 여부를 떠나 인식 속에든 상상 속에든 '존재'(?)하는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그 안의 리얼리즘적 맥락과 논리가 존재하듯 그 정도의 의미만 있다 해도 충분한 이야기로서) '생물학적 남성'으로 태어난 것이 순도 100% 역사적 사실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그 문제(남성이라는 것의 문화 맥락적? 의미, 아들, 아버지라는 명칭을 오늘날 우리가 받아 쓴다는 것의 새 의미)는 화두/미해결 문제로 남을 여지가 충분하고 오히려 거기에 주목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강조했던 것인데, 그게 잘 서로 소통이 되었는지(저도 지금 선생님 덧글을 완전히(?) 이해한 상태에서 그래도 남은 우려라 할 만한 것 맞는지)는 확신이 없네욥;ㅎ 암튼 서로 또 읽어보며 곱씹어보며? 좀 더 이해해갈 거라고 낙관하면서... 여러 풍부한 말씀 재밌게 배우며 보고 있습니다...
  • ?
    해달이 2012.02.29 23:32
    아..그리고 제가 반페미는 아니랍니다.*^^* 문제는 기독교의 기원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특히 마가에서 같은 여성이지만 예수의 생애 동안에 그를 따랐던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들이 비판을 당하고 있다는 겁니다. 상당히 당혹스러운 코멘트를 하는 마가의 이야기를 보고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해야할지 고민이 들더군요...누구말처럼 예수를 추종했던 1세대 예를 들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마가에서도 실컷 두들겨 맞듯이 십자가 밑까지 따라갔던 여성들도 두들겨 맞습니다. 왜일까요? 이 여성들보다 하혈하는 여자가 손이 마른 여자가 아니면 예수에게 향유를 부었던 여성이 더 위대해서 일까요? 요즘식으로 말하면 그들이 페미적이었기 때문에 그럴까요? 답답한 점은 향유를 부은 여자가 마가의 이야기에서는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가장 잘따르고 있다는 겁니다. 즉, 예수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이 여성은 마태의 이야기처럼 눕지 않고 앉아서 먹고 있다는 겁니다. 그레꼬 로마세계에서 누워서 먹는 게 일반적 식사관행이지만 여성이 누워서 먹는 건 창녀로 취급받았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마가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향유를 부은 여성은 급진적이고 페미적이아니고 오히려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너무 잘 따르고 있는 여성입니다. 한데 놀랍게도 이 여성이 십자가까지 따랐던 여성들보다 더 위대하다고 예수는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곳 어디든지 이 향유를 부은 여성의 이야기가 전달되게 하라고 말합니다. 아연실색이죠;;;해서 이야기를 촘촘히 파고 들면 그리 오늘날의 여성신학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 페미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오히려 마태가 더 파격적으로 다가옵니다. 율법적인 마태가 말입니다. 성서는 그만큼 복잡하고 골때리는 이야기이고 얼핏보기엔 뭔가 페미적이고 가난한 자를 위한 것 같지만 파고들면 그렇지 않은 면도 훨씬 많습니다....그래서 더 깊은 고민이 생기는 거죠? 저같은 사람은 말입니다.ㅜ.ㅜ
  • ?
    해달이 2012.02.29 23:35
    텍스트의 촘촘함과 그 시대의 맥락을 어떻게 이어갈지는 늘 고민입니다.~~아..그리고 또한 제가 예수가 신화적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오해하지는 마시길ㅋㅋ
  • ?
    청올 2012.03.01 22:35
    잘 읽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오늘날의 여성신학을 아는 것도 아니라서 해달이 님의 말씀을 촘촘히 이해하려면 신학적인 쪽으로는 공부가 더 필요할 거 같네요. 물론 샘이 반페미라거나 그렇게 생각하는 일은 없고요ㅎ '페미' '반페미' 자체가 그런 용어로 이분법적으로 담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물론 여기서도 샘이 그런 이분법을 좋아하신다는 뜻도 아니고요). 예수가 신화적 인물이라 주장하지 않는다는 오해 우려 등은 아마 저에게만 말씀하는 거 같진 않지만 그렇게 오해하진 않을 거 같고(신화적 인물이라 주장하면 나쁘다는 뜻도 저는 아니고)...;ㅎ
    어쨌든 저는 성경을 촘촘히 읽는 방식이나 신학은 차차 기회마다 공부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당사자로서 직관적으로 '이건 아니다' 하는 느낌이 올 때, 그런 얘기를 하는 것에 가깝기도 합니다. '적어도' 아버지, 아들 이런 얘기를 묻지 않고 되뇌는 방식은 아니지 않은가? 이런 아주 소박한(그러나 충분히 불온하다거나 불경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심지어 그럴 계제도 아니고 조용히 묻히거나 '에이 그건 그냥 그런 거지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근데 이제 중요한 얘길 하자...'는 식으로 우습게 무시될 수도 있는) 질문을 저나 우리가 스스로 던져봐야 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진지하게 탐구적으로 고민을 함께해주시는 해달이님께도 감동이고 많이 배우고 싶고, 그냥 많이 알지 못하더라도 다른 생각들도 더 듣고 싶고... 하네요. :)
  • ?
    해달이 2012.03.01 23:45
    네ㅋ 저는 오늘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구약 성서의 야훼도 아내가 있었다는 설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마존 사이트에서 Did God Have a Wife?: Archaeology and Folk Religion in Ancient Israel를 치면 바로 이 책이 나온답니다.ㅋ 그리고 신약성서와 관련해서는 뭐 여성신학에 기본적인 in memory of her를 지은 피오렌자(E. Fiorenza)가 있고요...번역된 걸로는 성서 소피아의 힘:여성해방적 성서 해석학과 동등자 제자직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여자는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인 걸로 알고 있구요...또한 류터(R. Ruether)가 지은 성차별과 신학이라는 책도 도움됩니다. 이 류터는 정말 다른 종교전통에도 박식한 면이 있답니다. 게렛 대학교의 교수인가 그렇쿠요...그리고 최근에 예수세미나에 속하는 여성신학자 분이 한명 있는데 이 분의 이름이 생각이 안나네요...아 Kathleen E. Corley입니다. 이 분 책 참 참신하고 좋은 것 같아요..물론 Luise Schottroff도 빼놓을 수 없군요...아마존에서 한번 이 사람들을 쳐보시면 꽤 괜찮은 걸 얻을 수 있을 거예요...ㅎ암튼..한백고백문과 관련해 벌어진 일련의 일들에 관해 꾸준히 글이 올라오길 기대하며...사실 그냥 저는 한백의 신앙고백문과 관련해 할말이 별로 없었는데ㅋ그냥 찌그러져 있는게 상책인 것 같아서...*^^*우연히 청올님과 대화를 하게 되었네요..댓글달아주시니 감사해요..좋은 하루 하루 되시길 빕니다~~
  • ?
    청올 2012.03.02 14:55
    우와...... 뜨아...... 이렇게나 엄청 많은 종합선물세트......;;를 가장한 숙제를......ㅋ (ㄷㄷ;;)
    고맙습니다(감동의 눙물이; 꾸벅 넙죽^^)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한백신앙고백문 토론방 한백 25주년 준비를 위한 토론방입니다. 한백 2012.02.21 2342
» 한백신앙고백문 토론방 '아버지' '(외)아들' 관련해 이어진 생각...(그리고 '정체성' 얘기에 관하여) 7 청올 2012.02.28 2789
3 한백신앙고백문 토론방 공개토론 - 한백 신앙고백에 대하여 (올빼미) 13 한백 2012.02.27 2501
2 한백신앙고백문 토론방 박종순 목사님의 사도신조에 대한 견해` 3 해달이 2012.02.27 3023
1 한백신앙고백문 토론방 오늘 출력해 나눠주신 주장 글을 읽고 1 청올 2012.02.27 2735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11길 19, 돈의빌딩 1층 안병무홀
02-364-6355(교회), 010-4890-5563(이상철), 010-3043-5058(유승태)
선교헌금, 일반헌금 : 신한 100-022-867226 한백교회
나눔과 섬김의 예배공동체, 한백교회
Copyrightⓒ 2012 hanbaik, All Rights Reserved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