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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신앙고백문 토론방
2012.02.27 13:21

공개토론 - 한백 신앙고백에 대하여 (올빼미)

조회 수 2512 추천 수 0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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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올빼미

한 집단의 신앙을 문서화된 텍스트 하나로 규정짓는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요.

그러나 신학 연구자로서, 그리고 한백에서 20여년 간 함께 해온 사람으로서, 한백의 공적인 신앙 고백을 만들고 그것을 예배나 기타 공적 자리에서 함께 진술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첫 번째 신앙고백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것은 계속 새롭게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겠지요.(“한백공동체의 온 성원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드리는 이 신앙고백은, 우리 사회와 세계의 변화하는 역사적 현실 안에서, 우리 공동체의 신앙의 내용과 형식이 성숙해감에 따라서, 나날이 수정되고 보완되어 점점 풍부하게 열려진 신앙고백문이라는 것을, 하느님 앞에서 함께 약속합니다.”)

아무튼 그런 취지에서 2002년에 창립 15주년을 맞아 새로운 고백문을 만들기로 했고, 저는 그 취지에 따라 이 일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진행 절차는 이렇습니다. 신앙고백 특위의 책임을 제가 맡고, 5명의 위원이 함께 협의해서 초안을 만들어냈고, 그것을 가지고 2회의 전 교인이 참여하는 토! 론회를 거쳐 확정안을 내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토론이 기대한 만큼 충실하지는 못했지만, 1회의 전교인 협의과정을 거친 첫 번째 신앙고백보다 좀더 많은 협의를 실행에 옮긴 것은 과정에서의 중요한 의의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몇년 전(년도가 기억나지 않는데, 아는 분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신앙고백 3’을 만들자는 제안이 있었고, 그 진행 책임을 도홍찬 선생이 맡기로 했습니다. 오랫동안 한백교회를 다니면서 교회의 전통에 대해 충실한 이해를 가지고 있고, 또한 인문학과 신학, 특히 민중신학에도 조예가 깊으며, 여러 사람의 생각을 충실히 듣고 대화하는 품격을 가진 사람이니 이 일에 적임자라 할 것입니다.

그 해에 새 신앙고백을 만들기 위해 먼저 ‘신앙고백 2’에 대한 평가를 듣고자 수련회 때에 전교인 토론회를 가졌습니다. 제 기억에는 그때 적지 않는 비판적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 2002년과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물론 여전히 ‘신앙고백 2’에 공감을 표하는 분도 적지 않았고, 해서 개정을 둘러싼 문제는 훨씬 더 신중한 토론과 협의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 사이에 생각이 달라진 이들도 있고, 그 이후 새로 교인이 된 이들도 적지 않으니 이것을 둘러싼 토론은 더 깊은 숙의를 필요로 하게 된 것입니다.

올해는 25주년이 되는 해이고, 운영위는 올해에는 어떡해든 ‘신앙고백 3’을 위한 논의를 본격화하자고 했으니, 시간의 압박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적지 않은 이견들이 서로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채로 여기저기서 오가고 있으니, 그 논의들을 여러 형태로 표출시키고 대화하는 일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교회 운영위가 25주년 기념 게시판을 만들어 놓았으니 이곳에서도 여러 의견 나눔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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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백 2012.02.27 13:22
    양파 2012/02/20 -

    어차피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정리하면서 이야기를 하죠... 올빼미님이 온몸의 참여의사를 밝히셨으니 한백이 가야할 방향에 관한 이야기를 차근차근 나눠봅시다. 어제 1주일만에 온(내가 알기에는 3주 정도) 도선생님의 코멘트가 교육부장으로 교육적으로 갔으면 좋겠다 하니 그 의견에 동조....
  • ?
    한백 2012.02.27 13:22
    물푸레 2012/02/21 -

    별로 당기고 싶지 않은 화살인데, 화살이 활 시위를 떠난 것 같습니다. 신앙고백3 특위를 잠시 가동하면서 느꼈던 것은 윗글에 나온바 같이 한백구성원 중의 소수가 현 신앙고백문에 대해서 거부감 내지 이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고(물론 대다수는 애착을 가지고 있으면 발전적인 의미에서 재개정을 원하였죠), 그러한 소수의 의견과 대화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담은 신앙고백문을 만들 능력과 자신감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유야무야된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지난 주일의 사태와 같은 것이 생길 것에 교인들의 우려도 한몫 했던 것 같고요. 그런데 이제 어떤 형태로든 짚고 넘어가야 할 시점이 된 것 같습니다. 고백문 작성자가 심각한 문제제기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이에 대한 해명이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신앙고백문에 이견을 가지고 계신 분이 직접 동참해주시면 제일 좋겠고, 다른 교인들도 뜻을 표시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한백교인들은 누구나 고백문을 매주 읊조리는 것이니까 결국 우리들 모두의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 ?
    한백 2012.02.27 13:22
    삐딱선 2012/02/21 -

    교회의 일상에서 떠나 있는 입장에선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어리둥절해집니다.

    아무튼 김 목사님의 마음이 결연하시다는 건 원글 읽으면서도 느꼈던 바구요.
    어떤 문제가 제기되었다는 것인지 좀 더 확실하게 알았으면 좋겠군요.
  • ?
    한백 2012.02.27 13:23
    청올 2012/02/21 -

    아아, 뭔가 말씀을 보태기가 매우 조심스럽고 이곳에서의 논의는 본격적으로 되기 전이니 섣불리 덧글 달기엔 너무 이르다는 생각도 들지만(;;ㅠ), 한 '평신도'로서 아쉬운 마음에 적습니다. 저는 지금의 (함께읽는글이나 [자꾸 늦어 놓치기 일쑤긴 해도] 삶의 고백이나 드리는 기도나 하늘뜻나누기나 등등과 함께) 매주 다함께 읊는 지금의 신앙고백문을 참 사랑해서, 오히려 결국 이렇게 논의가 된다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 변하려는 것인지 솔직히 약간 두려울 정도지만, 또 제가 생각지 못한 어떤 문제나 더 좋아지고 내용이 깊어진다든가 풍부해질 여지가 있다면 얼마든지 얘기 나누고 듣고 할 수 있겠지요...

    다만 저 같은 사람은 신학적은 물론이고 암튼 무지합니다만, 지금 드는 생각은 그날 즉석에서(물론 오랜 세월, 오랜 기간 얘기 나온 내용들의 연장선도 있겠지만) 교회에서 열렸던 논쟁에 식사/설거지 뒷정리를 이어서 같이 하고 다른 회의와 소통의 고민과 대화를 하느라고 안쪽이나 아예 바깥에 있어야 했거나 왔다갔다 하느라 첨부터 끝까지 그 자리에 있지 못했고 갈등의 어떤 징후와 증상만 오다가다 보고, 아니 무슨 일이지 하고 눈치만 보고 잘 파악하지는 못한 일이 개인으로서 못내 아쉬울 뿐입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금이라도 더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물론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저는 똑같이 하겠지만)...

    뭔가 사실은 이 일이 외부의 사실 왜곡 기사를 실마리로 하여 얘기가 시작된 것 같은데, 그런 계기로라도 마침 해묵은 이야기가 꺼내진 것이라면, 모두에게, 그러니까 저에게도, 용기와 지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대충 봉합하거나 미룰 수가 없게 직면해야 할 순간이라면, 정말 피하지 않고 확인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네요... 해묵은 그것이 무엇일지, 어떻게 생겼을지, 털어서 풀어 놓고 나서 또 그것을 어디까지 다시 어떻게 담고 정리할 수 있을지. 다만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지도 생각하면서 가야 할 거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한 사람으로서 저의 신앙고백은 지금의 한백 신앙고백의 신앙의 깊이와 밀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당장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지도 않지만). 신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그런 의문이 적절하거나 성립할 수라도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을 만큼 무지하고, 그것이 설사 만일 언젠가 신학을 공부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해결될 것 같은 문제가 아닐 거라(저의 성향상 오히려 끊임없이 회의와 당장 해결되지 않을 질문만 더 늘어가며 가지를 칠 것이므로) 짐작합니다. 다만 신이 있다면 아마도, 허리 휘게 일하고도 홀대받고 배척받는 사람의 허리뼈마디나 손발에나, 정신노동이라면 터질 듯한 머리에, 감정노동이라면 자존심에, 어떤 억압과 차별, 배제와 소외와 폭력으로 고통을 겪고 견뎌야만 하는 살아 있는 생명의 마음 마디에, 심장에 눈물에, 가장 사무치고 외로운 바로 그때 그곳에, 그리고 그런 것을 지켜보고 함께하지 못하는 만큼 따끔따끔할 뿐인 타인들의 양심에, ... 그런 곳에 어떤 모양으로든 녹아 있듯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이 깜냥에선 짐작할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신앙고백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저의 거칠고 음울하고 어둡게만 흘러가려 하는 언어를 밝고 정갈하게 표현해 주고, 대신 잘 정리해 드러내어 주고, 그런 다짐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같아서, 좋아합니다. 살면서 힘든 일 많을 거고, 이 많은 주변/세상의 고통의 아우성 속에 신은 대체 어디 있는지 안 보이더라도, 쉬이 절망하고 어두침침하게 있지 말고 그래도 다시 한번 밝게 씩씩하게 용기 내어 함께하자고,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있으니 외면하지 말고 힘을 내라고, 따뜻하고 정직한 손을 내미는 것 같아서요...

    (덧붙임:
    이 덧글을 남기다 새삼 신앙고백(1)과 신앙고백(2), 각 해제들을 보았습니다.
    갑자기 구체적인 이야기로 와서 죄송하지만 유일하게 제게 마음이 쓰이는 점이 띈다면 “오늘 스스로를 돌아보며 내일의 희망으로 일어서겠습니다” 정도입니다. ‘돌아보다’까지는 몰라도(이것도 ‘생각하며’라든가 당장 생각나지 않지만 다른 고민도 가능할 것 같기는 합니다), ‘일어서겠습니다’가 물리적으로 ‘일어서’지 못하는 경우에 비추어 마음에 걸립니다... 내일의 희망으로 ‘나아가겠습니다’라든가 ‘움직이겠습니다’ 정도면 어떨지, 싶기도 합니다.
    각기 자신의 경험이 달라 저도 무심코 쓸 때도 있지만, ‘일어서라’ ‘두 눈으로 보는 역사’ ‘한 귀를 막은 정부’ ‘절름발이 정책’ ... 과 같은 비유적 표현을 볼 때 느끼는 불편함과 같은 종류의 이유입니다.)
  • ?
    한백 2012.02.27 13:23
    김미정 2012/02/22 -

    이거 참 교회에 제대로 출석도 하지 않는 사람이 이런데 글을 올리는 게 마땅한지 잘 모르겠지만... 어쩌다 보니 제가 신앙 고백(2)에 본의 아니게 관여하기도 했고, 저 역시 아쉬움이 없지 않은지라 몇 자 적습니다.
    언젠가 수련회에서 신앙 고백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 역시 지금 우리의 신앙 고백문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아쉬움의 가장 큰 부분은 표현의 미숙함이었습니다. 어디선가 들은 것 같고 어디선가 읽은 것 같은 표현들. 삶의 진솔함과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는 매끄럽지 않은 표현들이 밥안의 모래처럼 껄끄럽게 입안에 맴도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건 이 작업을 한 사람들 대부분이 문학 분야의 프로들이 아닌 탓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나서 한 참 후 교회 무슨 행사 예배 때 '함께 읽는 글'로 쓰인 시가 한 편 있었는데, 전 이거야 말로 한백의 신앙 고백으로 부족함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전문가의 포스가 느껴지더군요.) 뭐 글쟁이가 아니고, 시인이 아니면 안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단순히 문학적 표현의 문제만은 아닐 거라는 겁니다. 그저 그 고백문은 고백문을 만들던 당시의 우리가, 아니면 당시 한백 식구들 중 여럿의 사회적, 실존적 상태의 반영일 겝니다. 굳이 글쟁이가 아니더라도, 시인이 아니더라도 예수님처럼, 초대 교회 기독교인들처럼 진정 한 그릇 밥의 소중함이 절절한 누군가라면, 이 땅에 참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천지 개벽같은 그 세상이 당장 내일이라도 오기를 바라는 누군가라면 훨씬 더 진솔하고 간절한 고백문을 담아낼 수도 있었겠지요.
    지금 되돌아 보건대 그 때 우리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니, 전 그때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기엔 저나 우리 사회나 지킬 게 너무 많았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다 보니 신앙 고백문(2)는 신앙 고백문(1)같은 비장함이나 래디컬함도 없고, 그렇다고 그걸 대신할만한 진솔함, 성찰성을 담았다기엔 뭔가 엉성한 그런 상태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고 나니 제게 다시 보이는 게 신약 성서의 주의 기도였습니다. 이제 생활엔 조금 더 가까이, 각종 활자엔 조금 더 멀리 있게 된 지금, 다시 읽는 주의 기도는 정말 소박하지만 절절한 아름다운 기도문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감사, 이웃에 대한 용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간절한 소망,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성찰에서 나오는) 간절한 기도. 그래서 저는 수련회 때 신앙 고백문 토론회를 하면서 우리가 이보다 더 좋은 고백문을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해 회의했던 기억이 나요. 사실 지금 제게 다시 신앙 고백문을 만들라 해도 10년 전 그때 보다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요....
    제가 정말 궁금한 거는요... 위에 올빼미님의 글 중에 있는 우리 신앙 고백의 ‘신학적인 문제’라는 겁니다. 우리 신앙 고백문에 ‘신학적인 문제’도 있나요? 지금 출력까지 해서 열심히 다시 읽어봤는데요... 어떤 신학적 문제가 있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야 뭐, 신학자가 아니니까 제가 잘 몰라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신앙 고백문의 글이 무얼 뜻하는지는 알고 우리 한백의 신학이 어떤 걸 지향하지는지 아주 모르지 않을 것 같은데, 어디에 도대체 신학적 문제가 있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기독교 신학이라는 게 한 두 갈래가 아니고, 결국 그 다양하고 방대한 신학적 흐름과 내용 중 무엇을 신학의 ‘정수’로 삼아 그것을 우리 삶에 직결시킬 고백문에 담을 건지의 문제일텐데요(그 방대한 신학적 내용을 고백문에 담을 수는 없을테니까요) 그건 사람마다 다르고 또 시대마다 다른 문제인 만큼 우리가 다시 살펴보고 논의하고 합의할 문제라고 봅니다. 그런데 ‘신학적 문제’라는 건 그런 ‘변화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정말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건데... 그건 뭔지 잘 모르겠어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꼭 누군가 말씀을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 ?
    한백 2012.02.27 13:23
    올빼미 2012/02/22 -

    제가 종종 듣는 저의 신학적 문제점이 한백의 신앙고백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고백하는 우리와 민중 사이의 이원론적 분리입니다. 이것은 민중신학 내에서 민중과 신학/신앙에 관한 중요한 논점의 하나입니다.
    민중신학에서 신학하는 주체는 전문가로서의 신학자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민중신학은 기존의 아카데미즘으로서의 신학에 대한 도전을 감행하였지요. 그런데 그것만으로 문제가 다 해소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신학이 전문가만이 알 수 있고, 전문가만이 구성할 수 있는 언어에 국한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민중신학이 전문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중신학은 아주 전문적인 담론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 민중신학회의 정관에서 회원 자격 부분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신학자 외에 목회자, 민중적 사회운동 활동가, 그리고 평신도지도자 등이 회원자격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 최근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재진술하면, 평신도'지도자'가 아니라 모든 시민이라고 하는 게 타당합니다. 한백에서 '하늘뜻나누기'가 모든 이들의 대화나눔을 담고 있는 것은 그러한 신학적 태도를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문제가 다 해소되지는 않습니다. 처음에 저의 한계라는 지적에서 시사되고 잇는 것처럼 한백의 민중신학적 신앙고백에는 고백하는 주체와 지향하는 대상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론적으로 이 둘을 분리하는 게 타당한가, 그 경계선은 무엇인가 등이 지적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민중의 개념적 정의에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민중 뿐 아니라 개념적 정의 자체가 사실에 대한 편의적 정의임에도 개념이라는 말이 그 이상의 함의과 사실 규정력을 갖고 있기 때무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민중과 고백하는이를 이분화하는 것은 자기 모순인 셈입니다. 구분할 수 없는 것을 나누어서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의 한계에 대한 지적은 타당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그것은 나눈 것은 저 나름의 민중신학적 태도 때문입니다. 저는 최근 우리 사회는 빠른 속도로 배제와 포섭의 사회적 장치가 정교해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해서 배제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우리 주변에 널려 있음에도 종종 우리는 그들에게서 고통의 현상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불편해하고, 그로테스크한 존재로 여기곤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범죄성향, 폭력성향, 부정적 의존성향, 질병 유병률 등등, 다양한 측면에서 부정적인 존재로 실재하는 이들이 있고, 그들이 점점 시민층과 이분화되어가는 현상이 강화되고 있다는 징후는 수없이 많습니다.
    유럽의 사상가인아감벤의 호모사케르, 벌거벗은 존재들, 쓰레기가 된 삶 같은 표현들이나, 자끄 랑시에르의 셈해지지 않는 자들, 잠재적 소멸을 표상하는 존재들 같은 표현들, 그리고 알랭 리피에츠나 미국의 빈곤연구에서 사용하는 언더클래스 등의 개념들이 그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또 안병무의 오클로스도나 서남동의 한 등의 용어도 그런 함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민중현상학적 고찰이고 그것에 의하면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은 점점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흉물스런 존재로서 표상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저는 고백하는 주체로서의 우리와 우리의 시야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민중 사이의 분리를 전재로해서 고백하는 것이 현실에 대한 우리의 솔직한 고백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그 거리감을 좁히려고 하는 것이 한백의 과제이자 민중신학의 과제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물론 이 점에 대해서 저와 다른 주장을 펴는 이들을 존중하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편입니다.
    한데 다른 신학적 논점들이라면, 내가 흔히 듣는 것에 따르면, 서양 고전 신학의 잣대로 우리의 신앙고백이나 최근의 민중신학을 비평하는 것입니다. 한데 서양학자들 자신이 그런 고전신학의 잣대자체를 폐기하고 있는 실정에서 그것이 우리를 비평하는 논거라는 생각은, 제 생각에는 논리적 타당성도 현실성도 없는 시대착오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을 문제시하는 이가 있는 듯합니다. 저는 그런 태도에 대해서는 좌시할 수 없고, 함께 할 생각도 없습니다.
  • ?
    한백 2012.02.27 13:24
    김미정 2012/02/23 -

    김진호 목사님이 말씀해주신 ‘신학적 문제(또는 한계)’에 대해서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신학적 문제라기 보다는 학자로서의 지적 솔직성, 또는 하나의 진술 방식(또는 의도된 이론적 전략)인 것 같은데, 그것이 신학이라는 하나의 이론적 체계에서 그 자체로 결함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니 뭐 그거야 신학계 내에서 열심히 비판하고 토론하며 해결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신학적으로 가능한 하나의 진술 방식이 우리 신앙 고백에 녹아 있다고 해서 우리 신앙 고백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이미 신앙 고백문(2)의 해제에 충분히 설명이 되어 있다고 봅니다. 해제 (1)에 있듯이 그런 내용에 우리 공동체가 합의하고 그것이 우리 공동체의 적절한 신앙 고백 방식이라고 동의했다면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 공동체의 신앙고백에 가장 적절한 방식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다시 얘기해볼 수 있겠지요. 그런 식의 신앙 고백 방식이 현실 속에서 우리의 실천력을 떨어뜨린다거나, 희생양을 타자화하여 우리 스스로가 민중임을 고백하는 데 주저하게 한다거나 하여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충분히 다시 고려해볼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신학적으로 문제있는 신앙 고백이라는 혐의를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솔직히 저는 지금도 그런 신앙 고백이 우리에게 타당하다고 봅니다.
    사실 기질상(?) 저는 그런 고백 방식이 잘 안맞는 사람입니다(또는 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그래서 오랫동안 목사님과도 때로 부딪혔던 부분이구요. 근데요... 지금은 이게 우리 한백 구성원 대부분의 존재 방식에 오히려 부합하는 거라고 봅니다.
    지금 제 상태를 봐도 차별받는 이 땅의 여성 중 한 명이지만, 만약 출산 예정인 여선생님을 기간제 선생님으로 쓴다면 기꺼이 그러라고 할 지 모르겠습니다. 또 2년마다 한 번씩 오르는 전셋값에 등골이 휘는 서울시 무주택자이지만, 경기도에 있는 작은 연립주택 값은 언제 오르나, 아버님 말씀에 그 지역이 곧 용도 변경된다는 데 정말 되려나 싶은 사람이거든요.(솔직히 지금은 헐값에 내놔도 안 팔리니 문제지만요...) 그렇다면 우리는, 아니 적어도 저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임이 분명합니다. 뭐 조금만 양심에 철판을 깔고 내가 직접 가해한 적은 없으므로 내가 왜 가해자냐고 우기고 싶다 해도, 내가 희생양을 양산하는 이 체제의 수동적 공모자로서의 혐의까지 벗을 수는 없거든요. 그렇다면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성찰적인 고백은 내가 도저히 벗을 수 없는 그 혐의에 대해서까지도 회개하고 고백해야 하는 것이라고 봐요. 우리가 10년 전 토론 끝에 이 방식을 받아들인 이유도 거기에 있을 거구요. 우리들 대부분이 때로는 가려지고 잊혀지는 희생양이기도 하지만, 또 많은 경우는 욕망으로 얼룩진 일상과 타협하며 안주하고 살아가는 게 사실이잖아요. 근데 나는 희생양이다, 난 이렇게 고통받고 있다고만 하면 솔직히 좀 찔릴 것 같거든요. 내 옆에 뻔히 더 고통받는 사람들이 보여서요...
    글쎄요. 여기에 무슨 대단한 신학이 필요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출발은 그냥 ‘찔려서...’거든요. 그래도 난 이만큼 사는데, 부족한 것 같지만 이만큼 있는데. 저기는... 저 사람들은 ... 참 이유 없이 고통받고 있구나... 하는 데서 출발하는 거거든요. 그런 성찰과 고백이 잘못됐다면 뭐 다시 얘기할 수도 있겠죠. 이건 신학자로서 김진호 목사님의 이론이 갖고 있다고 하는 학문적 한계와는 분명 다르다고 봅니다.
    물론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습니다. 특히 상상력이 빈곤한 저로서는 더 좋은 고백 방식을 언제든지 듣고 싶거든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신앙 고백문에 신학적 문제가 있다는 데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 ?
    한백 2012.02.27 13:24
    김미정 2012/02/23 -

    사족같지만 제 생각 몇 자 더 적어보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왜 우리 신앙 고백문에 그 찔림을 실어야 하는지, 더 대단한 신학적 내용과 거창한 기독교적 수사들 대신 한갓 그 찔림을 적어야 하는지 물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건 순전히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앞에서도 적었지만 우리의 신앙 고백문에 기독교의 모든 내용을 담을 수는 없을 겁니다. 결국 우리가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내용을 담을 수밖에 없는데, 저는 그게 예수님의 삶, 그 분의 가르침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고통받는 자들과 끝까지 함께했던 그분의 삶의 방식이라고 봅니다. 신이지만 인간의 몸으로 내려와 가장 낮은 자들 가장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고통받고 분노하며, 그들의 몸와 영혼의 해방을 위해 일하신 바로 그 부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그게 우리의 신앙 고백문에 담기면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한백 신앙 고백문(1)은 그런 예수님의 삶에 함께 하기 위해 민중적 당파성에 기초해 이땅의 노동자, 농민, 여성, 중산층, 청년, 학생으로서 이 땅의 자주화, 평화 통일 운동에 동참하는 행동으로 표현해야 함을 고백했던 것이구요, 신앙 고백문(2)에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나의 미시적 삶의 구석 구석까지도 고통받는 자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아니 단순히 고통받는 ‘자’들이 아니라 이 땅의 고통받는 천지 만물 모든 존재들에서 함께 고통받는 신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 성찰과 회개의 깊이가 일상에 젖어 아무 일 없다는 듯 살아가는 우리의 무심함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겁니다. 경제 성장률이 얼마, 국민 소득이 얼마 등등의 수치와 통계 속에 미처 보이지 않는 이들을 위해 이제는 예전처럼 집회나 시위를 열지 않지만, 화염병과 짱돌을 들지 않지만 여전히 그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비로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거지요.

    아휴... 그만 적어야겠습니다. 적다보니 제 일상이 떠올라 또 찔립니다. 희망버스 한 번 타 본 적 없는 제가 자꾸 이런 얘기를 하려니 찔리네요. ....

    다른 분들 얘기를 듣고 싶어 시작한 게, 자꾸 제 얘기가 길어집니다. 많은 분들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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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백 2012.02.27 13:24
    올빼미 2012/02/24 -

    김미정 선생이 잘 지적한 것처럼 한백의 신앙고백은 사람의 아들 예수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이는 고통의 현장 한 가운데로 왔고, 그 속에서 고통받는 이의 일원으로서 그 고통을 몸으로 다 겪었고 그것을 야기하는 체제에 대항하다 죽은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해서 그분은 우리와 같은 존재인 동시에, 우리가 공유하고 싶지 않은 모습으로 살다 간 분이지요. 우리는 한 편에서는 그런 예수를 따르겠다고 고백하면서도, 다른 한 편에서는 다른 욕망과 계획을 품고 있지요. 그래서 우리의 신앙고백은 이러한 이중성을 담아내려 했던 것이고, 특히 일상 속에서 우리가 도모하는 삶의 방식과는 다른, 예수의 모습을 닮고자 노력하겠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책고백이자 다짐인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신조 속에 들어 있는 초월자이고 유일한 구원자에 관한 신앙고백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메시아론과 상응하는 견해인데, 알다시피 민중메시아론은 예수와 민중이 사건 속에서 하나로 얽힌 메시아적 주체라는 것과, 그러한 민중 메시아 사건 속에서 민중은 예수로 인해 구원을 받고 예수는 민중으로 인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김지하의 문제제기를 서남동, 안병무 선생이 신학화한 것으로, 민중신학의 가장 핵심적인 논점의 하나입니다.
    오래 전 민중신학 내에서 한 연구자가 민중신학이 살아남으려면 민중메시아론을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한 폐기론이야말로 생존을 이유로 민중신학을 질식사하게 하는 주장에 다름 아니고, 민중신학이 극복하고자 했던 승리주의적 기독교의 아류로 민중신학을 전락하게 만들 것임을 주장했습니다. 설사 이러한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영원한 아웃사이더로 남아있게 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실제적 힘을 갖지 못하게 할지라고 우리가 지켜야할 신학적, 신앙적 기조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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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백 2012.02.27 13:24
    올빼미 2012/02/24 -

    민중메시아론은 민중신학을 둘러싼 첨예한 논쟁거리입니다.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은 물론이고 서양의 어지간히 진보적인 신학자들도 민중신학의 민중메시아론에 대해서는 비판적 문제제기를 제기하였습니다.
    보수적인 복음주의 학자들은 민중메시아론이 예수의 유일 배타적 구원자 신학에 위배된다는 견해를 취합니다. 그이들은 예수가 민중이라는 견해는 동의하지만 민중이 예수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전태일은 전태일이지 그가 어떻게 예수일 수 있느냐는 주장이지요. 이것은 실체론적 예수 이해의 소산인데, 그 주장은 타당성이 없습니다. 왜냐면 '개체적 실체로서의 예수'(real Jesus)는 학문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분을 다른 이의 진술 속에서만 알 수 있을 뿐이지요. 복음서들의 명칭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태가 전해준 복음' 등등. 또한 이런 주장은 실체론적 예수는 진술하는 사람, 혹은 예수를 기억한 주변의 사람들과 분리해냄으로써 예수를 알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정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예수를 어떠한 신학적 접근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물론 정통주의 기독교는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갖고 있습니다. 성서를 유일무이의 계시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주장 역시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유일무이한 계시로서의 성서는 수천개의 판본들을 비교하면서 학자들이 만들어낸 표준판일 뿐이고, 그 표준판조차도 수십번이나 바뀌었습니다. 더욱이 그 표준판들을 무수한 언어로 번역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성서를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번역된 성서들은 무수한 이독들을 담고 있지요.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의 표준판을 번역하고, 번역된 무수한 성서 중 하나만을 선택한다고 해도 그것을 읽는 이는 서로 제각기 읽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진짜 유일무이의 계시인가요? 역사적으로 그것은 권력과 상응하면서 결정났지요. 그렇다면 정통주의 기독교의 주장은 인간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주장에 다름 아닙니다. 요컨대 정통주의 기독교의 계시로서의 성서론은 자가당착을 담고 있습니다.
    한편 어지간히 진보적인 서양의 학자들은 민중메시론이 민중주의의 폐단, 특히 파시즘의 문제를 답습하고 있다는 지적을 합니다. 요컨대 민중메시아론은 자기성찰적인 요소가 결여되고, 민중 우상론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것은 서양의 신학이 가장 진지하게 민중신학과 대화한 내용 중의 하나인데, 안타깝게도 민중신학은 이에 대해 충분한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민중론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는 일부 진보적 학자들의 지적도 한국사회의 민중론 일반의 비성찰성을 문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데 민중신학의 경우 민중은 두 가지 상이한 범주에서 이야기됩니다. 하나는 '역사의 주체'라는 범주이고 다른 하나는 '고난의 담지자'라는 범주입니다.
    여기서 서양의 신학자들이 지적하는 성찰 부재의 민중주의의 한계가 노정되는 부분은 '민중=역사의 주체'론이 내포하는 문제점과 관련이 있습니다. 누가 역사의 주체인가의 문제는 미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역사적 과정과 맞물려 있습니다. 한데 민중주의는 역사의 변혁을 추동하는 집단에 의해서 가공된 가상의 민중론이 유령처럼 역사를 규정하는 논리로 작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역사의 주체라는 말은 종종 역사 추동세력에 의해 도구화된 민중론에 다름 아닐 수 있지요.
    반면 고난의 담지자에서 민중을 보고, 그 고통의 현상 속에서 민중을 발견하고 언술화하려는 관점은 민중 우상주의로 전락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민중은 끊임없이 역사 과정에서 삭제되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가려지고 있혀지는 존재지요. 심지어 그들 자신조차도 자신을 그렇게 삭제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민중은 늘 부재합니다. 그런데 민중신학은 그 부재한 민중을 찾아내려 합니다. 파편화되고 심지어는 소리조차 유실된 민중의 소리를 듣고 복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민중신학이고, 그것이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망각되고 있는지, 우리의 욕망들은 이러한 은폐의 메커니즘에 어떻게 공모하고 있는지를 들춰내는 것이 민중신학입니다. 곧 민중신학의 '민중=고난의 담지자'론은 그 서사화 과정 자체가 성찰 과정인 것입니다.
    여기서 민중신학의 민중메시아론은 빛을 발합니다. 예수가 바로 민중신학자들이 발견하고자 했던 그이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늙고 추한,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란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볼 수 없는, 저 그로태스크한 모습 속에서 예수가 내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을 민중신학은 민중사건이라고 합니다. 즉 민중의 파편화된 흉물스런 소리에서 예수의 소리를 듣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가 타자인 민중에게서, 아니 민중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는 순간, 곧 민중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한백의 신앙고백은 이렇게 '민중=고난의 담지자'론에 의거하고 있습니다. 하여 한백의 신앙고백은 자기 성찰의 민중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김미정 선생이 줄곧 저에게 문제제기를 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에게서 민중론은 성찰담론이 되었지만, 실천적 강조점이 약화되었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점이 제가 정리한 신앙고백에서 보완되어야 할 부분일 수 있습니다. 한데 저는 아직 그것을 보완하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해서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것을 넘어서는 신앙고백을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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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백 2012.02.27 13:24
    오백균 2012/02/24 -

    목사님의 글 그리고 딸린 댓글들을 통해서 머리가 지끈 거리지만 놓치고 싶지 않아 민중신학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번일(?)로 인해서 한백교회가 한층 성숙해지고 저같은 민중신학 몰이해로 고통 받는 민중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장이 되길 소망합니다.더 많은 글이 쏟아지길....`역사의 주체 그리고 고난의 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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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백 2012.02.27 13:25
    오백균 2012/02/24 -

    그리고 죄송한데 올빼미 양파까지는 알겠는데 다른 닉은 뉘신지 알수가 없네요. 알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아니면 글 마지막에 본명을 적어 주시면 어떨른지요???ㅎㅎ
  • ?
    한백 2012.02.27 13:25
    청올 2012/02/24 -

    아, 청올은 계영입니다. 전에 몇 번 실명을 밝혀놓고 글 시작한 적이 있긴 한데... 놓쳤네요. 덧글 수정이 안돼서 이렇게 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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