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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신앙고백문 토론방
2012.02.27 00:37

오늘 출력해 나눠주신 주장 글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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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샘 주장 글을 보고, 한 평신도의 마음에 이리저리 드는 생각

(홈피에 올리려다 보니 이니셜로 적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특정인에게 적는 편지가 아니라 공유했으면 해서 적는 글이기도 하고 다만 혼자 생각 정리하며 적다 보니 (너무 길기도 하고) 경어체가 아닌 것을,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1. 논쟁의 장이나 형식에 대한 문제제기에 관하여

처음에는 이것을 아직 홈피 논쟁에 관한 ‘진행발언’이 들어 있으셨던 샘의 문제제기를 수용하여, 홈피에는 올리지 않고, 다음주에 ㄱ샘처럼 출력해서 일단 나누어드리고 그다음에 어느 정도 공유된 다음에 홈피에도 생각해서 올릴까 했으나, 글을 쓰며 생각이 정리되기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옮겨갔다.
왜냐면 우선 이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마다 저마다 출력해서 매주 나눠주는 방식으로 하기에는 조금 번잡스럽기도 하고, 불특정 다수를 배제하기 위해 반대로 또 특정 다수(소수?)를 향한 선택적 공유가 될 우려도 분명 느끼기 때문이다. 홈피 글은 노출 위험은 있지만(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적으려 한다) 그만큼 누가 와서 어떻게 볼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쓰는 것인데, 종이 글이나 메일은 글쓴이에게 전권이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 선택적인 부분(그날 출석 여부, 메일주소와 메일 잘 열어보는지 여부, 새로 온 분은 어떨지 고민, 누가 받고 읽으셨는지 다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미처 빼먹고 못 주는 바람에 애초에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문제 등)이 불편한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선 차라리 두 가지를 타협하자면 홈피 글을 그대로 적은 대자보를 홈피 글과 병행해 붙여놓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시간적으로도, 분명히 선생님의 글이 담긴 출력물이 그것을 받아 읽은 사람들의 마음 하나하나에 들어가 영향을 준 것이 이미 있고, 그것에 대한 반응들이 오늘을 비롯해 한 주간 어떻게든 마음속에 또 어떤 식으로든 영향/작용을 미칠 텐데, 그것에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기에는(또는 그러기가 부담스러워서 접어버리기에는), 아무래도 이래저래 저는 좀 부담되기 때문이다. 얼른 오늘 생각날 때 글을 써서 정리해 홈피에 올리고... 틈틈이 홈피에 들어와 보면서 논쟁을 보는 편이 그나마 낫지 않을까... 생각해서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그 뒤에 선생님이 제기하신 두 분이 어떻게 반응하실지는 각자 목사님들이 판단하실 일이고... 저는 평신도가 할 수 있는 얘길 한다고 생각한다.

홈피에서는 처음에 ㄱ목사님이 홈피에 공개토론을 제안하고, 전화는 받지 않겠다는 것을 타협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선언했지만, 저는 그것을 이 갈등의 시작으로 보지만은 않았다. 그 이전의 맥락도 있는 것이다. 분명히 지난 주 언성 높아진 어떤 장면을 보았고, 그에 대한 어떤 반응으로서 작심하고 홈피에서 아예 공개적으로 하자고 대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ㄱ목사님의 방식은 그 선에서 이해했었다(ㄱ샘의 지적처럼 장년층이 홈피를 많이 보시지 않을 수도 있고, 애초 한백 홈피 자체가 그렇게까지 모두에게 활성화된 것은 아니니까 일말의 의아함이나 한계를 느끼기도 했지만, 그것이 상쇄될 만큼의 갈등의 한 장면을 목격했으므로 그 대응으로서 이해가 갔다는 것이다). 어차피 어느 주에 그때 출석한 사람들만으로 잠시 얘길 해보자 해서 그것이 또 전체적인 공론의 장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홈피 게시물에 덧글로도 달았지만 저는 그날 부엌과 현관 밖을 왔다갔다 하느라고 그 자리에 참여할 수 없었고, 자의든 타의든 그런 사람들이 많았고, 그 주에 출석 못한 분도 많았고, 아마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미 가끔 그렇게 즉석에서 열리는 대화의 장이라는 것의 한계는 저도 ㄱ샘의 말씀처럼 좀 산만하다고도 느끼고, 사전예고된 총회도 아니고 즉석 대화로 보기에는 애매모호하게도 그에 비해 중요한 얘기와 결정이 오간다는 것, 그러나 또 여러 상황과 맥락상 그 이상의 어떤 또 다른 절차를 만드는 것보단 그럴 수 있다는 것까지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고 저의 한계도 있기에 그냥 그 선에서 고민을 멈춘 것도 있다.
그러나 그런 저도 어떤 언성 높아진 현장은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홈피의 공개토론 제안 글에도 놀랍고 걱정스러운 맘은 들었지만 그 전의 격앙된 갈등 장면에서도 그랬기는 마찬가지다. 그 정도로 어떤 갈등이 심각하고 그것이 드러난 상황이 공개되었다면, 그 다음에 공개의 수위는 누가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이 정해졌거나 ‘이래야 하는데 저랬다’고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평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 같다. 오히려 그렇게 보면 ㄱ샘이 글에서 질문들을 던지고, 그것에 대한 대응을 보아서 이후의 말씀을 하겠다는 선언 또한 (홈피 게시물로 공개토론을 제안한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일방성이 있는 선언이고 제안인 셈이다. 어차피 각자의 입장에서 각자의 더 편한 스타일대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도 있다... 저 같은 사람도 애초 어느 쪽으로부터도 반드시 같이하자는 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배척’된 것도 아니니, 그냥 저 편하고 자유로는 방식대로 생각해서 적는다. 이후 논쟁의 방식이나 장, 형식에 관해서는 얼마든지 서로 대화하고 조정할 수 있는 수준에서 조정해 얘기를 풀어나가실 거라는 바람(믿음)이 있다.


2. ㄱ샘이 제기하신, 신앙고백에 대한 신학적 쟁점에 관하여

‘신학’을 잘 모르는 저에게 선생님이 예로 들어 보여주신 것과 같은 신학적 쟁점들은 삶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라 생각한다. 또 이런 생각도 단지 신학자의 접근보다 진지함이나 아카데믹한 수준 등에서 뒤처진다고 하여 혹여 무시될 만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학이든 종교학이든, 내가 신학자이든 목회자이든 평신도이든 어느날 하루 교회에 들렀다 간 사람이든, 신앙의 정도가 스스로 어느 만큼 어떤 내용으로 있다고 생각하든, 각자의 자리에서 자유롭고 편하게 (역할과 책임의 한도만큼만 의미를 발휘하겠지만) 이야기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말하고 싶다.
ㄱ샘이 한 가지 예로 제기하신 신학적 쟁점―‘천지 만물 안에 더불어 살아계신 하느님’이라는 말에 관한 이야기―은 저로서는 매우 흥미롭고,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하나만 우선 보여 주셨고 이후에 제대로 논쟁의 장이 마련되면 하나하나 말씀하실 거라는 것에 개인적으로 그런 기회가 있다면 더 배우고 이야기 듣고 싶다는 기대가 갔다. 제가 ‘평가’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그것이 가령 어떤 신학적 입장인지 그런 입장이 규정된 것이 있는지도 모르나, 아무튼 어떤 입장이든 간에 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지적처럼 ‘천지 만물’(또는 천지+만물인지, 천지는 이분법인지 아닌지 등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만물에는 어떤 것이 포괄되는 개념인지를 밝힌 다음에)을 ‘신’이 포괄하는 내용도 같이 담을 수 있다면, 정말 어쩌면 더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차차 더 들어보고 논쟁이든 뭐든 고민도 해 봐야 좀 더 알고 개인적인 판단이든 뭐든 들겠지만.
그러나 한편 또 제 생각에는―당연히 신학의 문외한이 말하는 소리지만―그 매력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을 반드시 매주 모두가 읽는 고백문에 넣어야 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제 한계에서 스스로의 생각을 검열하지 않고 자유롭게 말해보면, ‘신’의 위상은 그동안 한국 기독교에서 너무나 절대화되고 말 그대로 (역설적으로) 이젠 뭐 ‘우상 숭배’(?)라 해도 좋을 만치 주객전도되고 그 위용이 압도적이어서, 굳이 (모든 신학적 내용을 다 담지도 못할) 매주 다같이 읊는 문장에 ‘천지 만물’이라는 말을 ‘신’에 포괄시켜 명시하지 않더라도, 뜻을 나누는 데 별문제가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신앙고백문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면 모르겠는데, 저로서는 그런 문제가 치명적이거나 본질적인 결함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신앙고백문은 소박하게 ‘교집합’ 정도를 담으면 좋다고 생각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가령 저는 저의 신앙고백의 수준보다 현재의 신앙고백의 밀도와 수준이 매우 높은데, 그것을 저의 신앙고백의 수준에 맞추어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얘길 할 것이다(지난번 홈피 게시물에 댓글 달면서 추신으로 ‘일어서겠습니다’ 정도를 언급한 것처럼, 기회가 되면 그 의견이 반영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저의 경우는 몇몇 찬송가 가사에서 ‘아버지’ ‘아들’이라는 말이 매우 불편하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하느님은 남자인가?, 과연 젠더적 명칭을 쓰는 것이 적절한가?, 신의 이름까지 빌어다가 우리 안의 뿌리 깊은 가부장제와 가족주의에 무게 싣는 방식을 이대로 침묵하며 받아들여도 될까? 등등의 고민), 찬송가를 부를 때 그런 단어가 나오면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매우 난감하고, 그래서 결국 그 부분만큼은 소리 내지 못하고 공백으로 넘어가거나(이렇게밖에 못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무력하고 별로 기분 좋지 못한 일인 소극적 일이지만), 가끔은 ‘사람’으로 대체해보기도 하고, ‘딸’로 해볼까 고민도 해보지만, 아직까지 정답이나 가장 좋은 대안을 찾지는 못하는 일이 있다. 오늘 ‘당신은 하늘의 아들’에서 그랬다. 그런 가사가 나올 때마다 배제되는 느낌이 너무 싫다.
어쨌든 그런 논쟁이든 이야기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진지하게 제기해서 장을 마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이 ‘담임목사’의 책임이라고만 생각 들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고 싶은 분이 제안하셔서 세미나 팀을 꾸려서 제안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때 개정 위원을 어떻게 누구를 포함할 것인지의 문제부터 열어 놓고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 과정 자체에 해묵은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그 절차와 민주성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는 분명히 필요할 텐데, 그것이 ‘신학적으로 어떻다’는 평가와 마구 뒤섞이는 것은 아니어야 할 거라 생각한다. 신학적 견해의 차이에 따라 어느 정도 어느 비율로 구성원이 조합이 되어 책임을 가지고 참여해야 할지의 문제부터 공개토론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신학적, 내용적으로)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갈 문제는 아닐 것 같고, 신학적 입장의 차이이든 견해의 차이이든 그것을 전제하고 존중하고 논쟁한다면 생산적인 논쟁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아직은/여전히? 낙관적인) 기대가 있다.


3. 홈피의 ‘외부 유출’, 한백의 정체성을 사회적으로 규명해야 하는가의 문제

가능한 한 전부가 볼 수 있는 참여 공간이라는 것은 완벽한 곳은 없을 것이다. 이래도 저래도 한계는 있다. 어차피 홈페이지에 노출하나, 교회 예배시간이나 토론시간이나 예배 후에 커피숍에서 얘기하나 간에, 찾아와 보고 듣고자 하면 하는 것이고, 보아도 어느 이상 이해/파악/참여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백에서 정확한 ‘내부’와 ‘외부’는 어디까지인가? 예배 출석해서 출력된 종이를 받거나, 메일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내부’자인가? ‘등록’ 교인이 내부자인가? ‘등록’해 놓아도 오랜 동안 이곳에 오거나 교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등록하지 않아도 자유롭게 오가면서 밀도 있는 고민을 (빈도가 어떻든 간에)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외부’라는 것이 고정적이지도 않지만, 어차피 100% 보안을 할 수도 할 필요도 없는 상황에서, 외부의 눈치를 보는 것은 매우 부차적인 문제라 생각한다. 숨기려 해도 눈치가 있고, 알 사람은 다 안다.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자세히 파악할 수도 있다. 당연하게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왜곡하거나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외부에 신경 써야 할 부분은, 가령 어떤 개인 정보가 유출된다거나, ‘피해자’ 보호가 필요한 경우, 신상 ‘털리기’가 우려될 경우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가령 ‘국보법’으로 어떤 문제가 들어온다든가, ‘종북 좌파’라고 비난을 받는다거나, 어떤 종류의 낙인과 핍박이 외부로부터 들어올 때, 그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100% 논리적으로 준비하고 갖추어 놓는다고 해서(갖출 필요가 없다는 얘긴 아니다, 준비돼 있을수록 좀더 마음이 든든하고 편할 것이라고는 생각한다) 그것을 완전히 방비할 수 있는가? 더구나 그런 상황에 대처하는 데 신학적인 대비가 직접적 도움이 될 것인가?
저의 답은 그럴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문제가 터지면, 그런 문제를 일으킨 쪽(국가든 민간이든 어떤 개인이든 집단이든 간에)의 잘못이고 도발이며 그것에 관하여 싸움이든 대처를 시작하면 되는 것이지, 그런 문제가 혹여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 일어날까 우려하여 내가 내 입과 손발을 일부 묶거나 제한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런 자기 검열이야말로 국보법과 같은 악법의 대표적인 폐해이자, 그것들이 가장 크게 노리는 효과이기 때문에도 더욱 그러하다.
뒤집어 말하면, 신학적 논쟁은 신학적 논쟁으로 철저히 집중해서 해야 의미가 있지, 여기에 마침 덤벼든 외부의 왜곡이나 자극을 끌어들여 논쟁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한백의 신학적 정체성이나 나아갈 길에 관한 문제, 또 신앙고백의 문제, 이 얘길 하는 데 외부 유출과 왜곡의 문제까지 붙어 얼크러지면 점점 더 풀기 어려워질 것이다. 이 문제들은 물론 시기적으로 딱 얽혔고(선거철이라는 게 온갖 것이 다 용광로처럼 휩쓸리고 빨려들어 갔다 내쳐지기도 하고 그러다 상처 주고받고 피 흘리기 딱 좋은 때이므로, 불필요한 ‘합선’에 더 긴장하고 조심할 필요가 있다), 내용적으로도 얽히고 통하는 부분이 있지만, 통하는 부분을 함께 논의해서 얻는 이익보다는 그것이 마구 뒤섞여 혼란만 주는 손해가 클 것 같다.
신앙고백과 신학에 관한 문제는 그것대로 신학적으로 제기하고, 사회적 자극에 대한 규명이나 외부에 대한 대처는 그것대로 진행하면 된다. 저는 후자의 경우는 본질적인 것도 아닌 데다, 하물며 후자 때문에 전자가 마구 요동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둘을 철저히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 ‘외부’가 무엇인지 정확하지 않은 것은, 처음 외부 기사 얘기를 갖고 했던 토론 때 한 분의 지적처럼 ‘이 문제에 단순하게 대처하려는 것은 우리가 외부를, 적을 너무 쉽게 정하고 가는 것 같아서 거부감(고민?)이 든다’는 내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거철 국면의 외부 자극에 왜 한백이 (외부가 한백을 들쑤실 수 있고, 거기에만 제한적으로 대응할 수는 있지만) 알아서 자기 본질적 정체성까지 통째로 걸고 들썩여 주어야 하는가? 더구나 작정하고 달려들어 찧고 까부는 이들은 이미 한백교회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선언하는지에 애초 관심도 없어 ‘방어적’ 에너지 소모는 의미 없는 상태에서, 마침 터진 외부에 대한 대항이나 사회적으로 한백의 정체성을 마치 규명해야 하는 것처럼 논의를 가져가는 것은 오히려 한백의 내부 문제를 풀기 위해 외부의 자극을 활용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 책임을 ‘담임목사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식으로 지울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4. ‘목자의 책무는 양무리를 보호하는 것이다’,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보나마나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모른 채 한백의 신앙고백문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문제의 주위에만 맴돌 터’라는 ㄱ샘의 표현에 관하여

(여기서는 ㄱ샘께 더 특별히 드리는 말씀이라 존칭이 자연스레 나왔습니다 양해부탁요;;)

이런 표현에서 어쩌면 한백 정체성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 같은데, 저는 목회자와 신도의 구도를 목자와 양무리로 생각한 적이 없기에 저런 말씀은 불편했습니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보호해주나요. 교회에서 각자의 책임과 역할은 다른 거지만, ‘양떼의 동의 여부를 떠나서 보호해 주어야 하는 책무’를 목회자에게 온전히 지우는 방식에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막상 교회가 외부로부터 어떤 공격을 받고 예상을 뛰어넘는 위기에 처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것은 목회자부터일 것이고, 일반 신도들 개개의 힘이 모여 목회자를 보호해야 할 겁니다. 그럴 때가 아니더라도 목회자에게 일방적인 살신성인의 희생을 강요해서도 안 되고, (그것과 정확히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특혜나 권위를 행사하는 역할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의 양무리/양떼라는 성서적 비유가 갖는 이분법과 수직적 질서는 불편합니다(개인적으로는 예수와 신도, 예수와 제자 관계라고 해도 그런 비유는 이미 일정 정도 불편함이 있지만).

또, 문제의 ‘본질’이라는 말씀은 아마도 신학적인 의미에서의 디테일한 내용들에 대한 평가라든지 제개정 절차에서의 문제를 뜻하시는 것 같다고 저는 파악했는데, 공개토론 제안 글에 ‘덧글 단 사람’ 중 하나로서, 저는 그것이 문제의 ‘본질’인지도 저는 아직 잘 모르기도 하고 오늘 선생님의 글을 보고 나서도 그것이 문제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설득력 있게 와 닿지는 않은 데다가, 우려하신 것과는 달리 한백의 신앙고백문을 두고 얘기 나누거나 문제제기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는, 기왕 얘기 나왔으면 무엇인지 진지하게 접근할 문제라는 나름의 생각을 표현했더랬습니다. 다른 덧글들을 보아도 한백의 신앙고백문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문제에만 맴도’는 식으로 그 의제 자체를 쉽게 거부하는 덧글은 제가 보기에 없었고, 오히려 더 말씀 들어보자는 덧글들이었습니다.
어떤 것이 문제라고 생각할 때 그것의 접근 방식 자체가 하나가 아니고, 그것의 해결 방식이나 내용 또한 하나가 아닐 텐데, 어떤 것이 더 본질적인 것이고 어떤 것은 주위에만 맴돈다고 생각하신다면, 다른 사람(덧글러?;;)들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어떤 얘기밖에 못할 것이라고 미리 판단하고 평가하시기보다는, 그 본질적이라 생각하시는 바를 말씀하시면 그것을 주제로 대화를 열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번에는 그 방식이나 절차가 선생님 보시기에 온당치 않다고 생각하신 문제여서 그 장에서 말씀하시지 않고 거부하시는 것임을 오늘 글을 읽어서 잘 알고 저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다면 좀 더 많은 사람이 참여 가능하고 좀 더 바람직하고 서로 수용 가능한 방식을 찾아볼 필요가 있겠지요.
그러나 어쨌든 오늘 한편으로는 누군가의 얘기 ‘우리는 어차피 이 문제에 끼어들 수 없는 사람들이다(그렇게 되어 있다)’에 조금 무력하게 동의하면서도, ‘그치만 ㄱ샘이 이것을 모두에게 보라고 나누어주신 것은 이걸 읽는 사람들도 이미 모두 참여하게 하신 것이지’ 하는 지적에도 동감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고, 뭔가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어떤 문제의 프레임이 명확히 있고 그것의 바깥에 있는 다른 (얼마든지 더 다양하고 풍부할 수 있는) 접근은 부차적이라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복잡하여 이렇게 길게 글을 남기게 된 것 같습니다.


5. 결론(?)

이렇게 진지하고 치열하게 싸움에 뛰어들고, 걸고, 받고, 만나는 과정은 매우 멋지고 열정적이고 뜨겁고 생동감 넘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까지 힘들게 동참시키셨다 풀썩ㅠㅠ 고도의 정체성 논의에 아무도 낚지 않았지만 혼자 박세게 낚인 비신학 평신도 1인 올림;;ㅠ
  • ?
    청올 2012.02.27 00:37
    적고 나서 보니... 이런 논쟁 자체가 어쩌면 근원적 의미에서 신학논쟁인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민중신학도 모르긴 마찬가지지만, '민중'신학이라는 말에 제 식대로 기대를 가지고 본다면 말입니다. 현실 대응에서 분리할 차원은 분리하되, 근본적으로는 ('한백의 정체성'과 '신앙고백'과 '신학적 논쟁'이 '외부의 자극과 왜곡에 대한 대응과 어떻게 만나느냐' 하는 문제에 관하여) 분리하려야 할 수 없는 어떤 부분에 집중해서 보는 것도 또 필요하단 생각도 드네요 그 자체가 시험대인 듯한 위기감도 있고 지금 이 덧글에서 제 표현도 한계가 있지만요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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